영광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박인비. 그러나 서양 미디어들은 그랜드슬램이라 인정하지 않는다. [게티이미지]
그랜드슬램이냐 아니냐 논란이 일고 있다. 박인비의 4개 메이저대회 우승에 관해서다.
서양 주류 언론 대부분은 (커리어) 그랜드슬램이 아니다는 입장이다. 미국 골프 채널은 그랜드슬램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영국 BBC는 박인비가 ‘4개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한 안니카 소렌스탐 등의 그룹에 합류했다’고 썼다. 그랜드슬램이 아니라는 우회적인 표현이다.
조심스럽게나마 그랜드슬램이라는 표현을 쓴 매체는 미국 ESPN 정도다. 영국 텔레그라프는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랜드슬램이 아니라는 서양 미디어의 논리는 그랜드슬램은 모든 메이저대회에서 우승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LPGA 투어에는 5개의 메이저대회가 있으며 박인비는 그 중 4개만 우승했으므로 자격미달이라는 주장이다.
반면 LPGA 투어는 공식적으로 박인비의 4개 메이저 우승이 그랜드슬램이라고 발표했다. LPGA 투어 측은 “메이저 대회 수에 상관없이 그랜드슬램은 4개 메이저 대회 우승을 의미한다”고 재차 보도자료를 냈다.
미국 언론들은 그랜드슬램의 어원이 브릿지 게임에서 13개 매치를 모두 이긴 것을 뜻하는 말이므로 숫자에 상관없이 전부 우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LPGA 투어는 “여자 골프에 메이저가 2개 있던 시절도 있고 3개 있던 시절도 있다. 베이브 자하리스의 경우 3개 메이저대회 시절에 3개 메이저에서 모두 우승했는데 4개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랜드슬램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따라서 그랜드슬램은 전부가 아니라 4개 메이저 우승”이라는 했다.
기본적으로는 LPGA가 무리한 측면이 있다. 2013년 에비앙 마스터스를 메이저 대회로 승격시켜주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박인비는 오리지널 4대 메이저에서 우승했다. 메이저 수를 늘리지 않았다면 제대로 인정받았을 텐데 억울한 측면이 있다.
메이저대회를 5개로 늘린 것은 전통을 깨는 것이다. 보수적인 골프에서 공격받을 가능성이 상당히 컸다. 그러나 강행했다. 메이저 대회의 가치가 떨어졌고 그랜드슬램에 대한 개념규정에도 혼란이 생겼다.
4개 메이저가 그랜드슬램이면 5개 메이저를 모두 우승하는 것은 뭐가 되나. LPGA 투어는 슈퍼 그랜드슬램이라고 부른다. 선례는 있다. 1988년 테니스의 슈테피 그라프가 4개 메이저대회와 서울 올림픽에서 우승했을 때 이런 말이 나왔다. 미디어는 그라프의 업적을 두고 슈퍼 그랜드슬램 혹은 그랜드 그랜드슬램이라는 용어를 붙였다.
LPGA 투어는 골프에서도 (커리어) 슈퍼 그랜드슬램이 있다고 했다. 카리 웹은 1999년 두모리에 클래식에서 우승했고, 이후 나비스코 챔피언십과 US 오픈, LPGA 챔피언십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웹은 2002년 브리티시 여자 오픈에서도 우승했다. 5개 종류의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한 것이다.
이걸 슈퍼 그랜드슬램이라고 부르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브리티시 여자오픈은 일반 대회였다가 2001년 두모리에 클래식 대신 메이저대회가 됐다. 담배회사 두모리에는 축출됐다. 웹이 다섯 개의 다른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한 건 맞지만 두모리에 클래식과 여자 브리티시 오픈은 같은 걸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 더 설득력이 있다.
5개 대회 중 4개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은 4개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는 것보다 순도가 떨어진다. 우승 확률이 10%인 정상급 선수라고 가정할 때 한 해에 4개 메이저대회를 모두 우승할 확률은 1만분의 1이다. 5개 메이저대회 중 4개 메이저에서 우승할 확률은 그보다 4배 이상 높다.
메이저가 5개로 늘면서 그랜드슬램이나 커리어 그랜드슬램이 훨씬 쉬워지고 그만큼 희소성이 떨어져 가치가 낮아진다는 얘기다. 박세리를 비롯한 연륜이 많은 선수들은 지금 골프를 시작한 선수들보다 그랜드슬램 달성에서 훨씬 불리한 여건에 놓이게 된다. 미국 미디어가 단순히 발목잡기를 하는 것만은 아니다.
5개 메이저의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다. 이미 5개의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한 카리 웹이 새로 메이저가 된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면 뭐라고 부를까. LPGA는 “슈퍼 슈퍼 그랜드슬램이라든지, 리얼 슈퍼 그랜드슬램이라든지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곤혹스러운 답이다.
결국 LPGA는 그랜드슬램이라고 공식 정의했고 미국 미디어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대치국면이다. 양쪽간의 자존심 싸움에 박인비가 피해를 보는 인상도 있다.
그랜드슬램 같은 용어의 정의를 협회가 하느냐 미디어 등을 필두로 한 사회가 하느냐는 생각해 볼 문제다. 국제경기에서 판정 등 논란이 생겼을 경우 무조건 우리가 맞고 당신이 틀리다며 내셔널리즘에 기대는 것은 맞지 않다.
그래도 협회의 공식발표이므로 그랜드슬램으로 인정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서양 미디어들이 이번 건에 대해서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하는 측면이 있다. 그랜드슬램이라는 용어는 창세기부터 존재한 만고불변의 개념은 아니다.
미국 미디어도 그랜드슬램에 관해 자의적 해석을 한다. 예를 들어 보비 존스나 벤 호건, 아널드 파머 등이 활동하던 시절 메이저, 혹은 그랜드슬램의 개념은 명확하지 않았다. 그냥 큰 대회에서 우승한 것이었다. 나중에 그랜드슬램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차후 소급 적용을 한 것이다.
마스터스가 모두가 인정하는 메이저대회가 된 것은 1960년이 다 되어서 이지만 그 이전 우승한 선수들도 다 메이저대회 우승자 취급을 받는다.
박인비는 에비앙 마스터스가 진짜 메이저가 아니고 제 5의 메이저 시절 우승했다. 같은 논리라면 박인비의 우승도 소급적용할 수도 있다. 미국 미디어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결국 힘이 중요하다. LPGA 메이저가 5개가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알려졌다.
미국 과자 회사 나비스코가 메이저 스폰서에서 빠지겠다고 했다. 새 스폰서를 구하지 못한 LPGA는 상금이 크고 LPGA에 우호적인 에비앙에 메이저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일본 항공사 ANA가 나비스코 대신 메이저 스폰서가 되겠다고 나서면서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면서 메이저가 5개가 됐다는 거다.
정확한 사실이든 아니든 스폰서 문제로 혼란이 생긴 것이다. 남자 메이저대회는 타이틀 스폰서가 없어서 이런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없다. 여자 골프는 아직 힘이 부족하다.
박인비는 브리티시 여자 오픈 우승 직후 “목표를 이뤘기 때문에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AP통신은 이를 두고 “에비앙에서 우승해서 그랜드슬램 논란을 끝내는 것이 어떤가”라고 썼다. 현재로서는 가장 명쾌한 답이다.
성호준 기자
sung.hoj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