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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가문의 200년 역사 돌아보기

기자2018.06.06 오후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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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톰 모리스는 1800년대 스코틀랜드 최고의 골프 챔피언이다. 그의 아들 영 톰 모리스 역시 골프 스타로 자랐다.

가족이 주인공이 된 골프사의 명승부는 매우 특별하다. 골프사를 수놓았던 이른바 ‘골프 명문’ 집안의 역사가 이러한 명승부 속에서 나왔다. 1800년대부터 최근까지, 세계 골프계를 호령했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돌아봤다.

9세기에 흔했던 ‘골프 가문’

프로 골퍼라는 직업이 처음 자리 잡기 시작한 1800년대에는 지금보다도 더 ‘골프 가문’이 흔했다. 가장 잘 알려진 건 모리스 부자다. 올드 톰 모리스(1821~1908)는 클럽 메이커, 그린 키퍼, 코스 디자이너, 골프 코치 등 많은 직종을 겸했지만 무엇보다 프로 골퍼로 유명했다. 모리스는 1860년에 최초의 디 오픈 챔피언십에서 2위를 한 이후 1861년부터 1867년까지 네 번 우승을 한 당시 스코틀랜드 최고의 챔피언이었다.

이러한 모리스를 13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이긴 아들 영 톰 모리스(1851~1875)는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영 톰 모리스는 부친을 닮아 침착함도 갖췄었지만, 한층 더 뛰어난 힘 넘치는 스윙, 당시에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퍼팅 실력, 그리고 약간의 자만심 덕분에 대회에 참가하기 전부터 이미 골프 스타가 돼고 있었다. 그리고 고작 17세의 나이에 영 톰 모리스는 부친 올드 톰 모리스를 3타 차로 누르며 1868년 디 오픈에서 처음으로 우승했고, 그 이후 3년 연속 우승컵을 지켜냈다.

모리스 부자는 파트너로 함께 플레이하며 다른 프로 골퍼들과 챌린지 매치를 자주 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정받았던 라이벌은 바로 파크 형제였다. 형이었던 윌리 파크 시니어(1833~1903)가 조금 더 성공적인 커리어를 달성했는데, 파크 형제는 캐디로 골프를 시작했고 프로가 되기까지 사연이 복잡했다. 윌리 파크 시니어는 클럽 하나로 골프를 배워야 했던 환경 속에서도 뛰어난 드라이버와 퍼터 실력을 키워서 1860년에 처음으로 디 오픈에서 우승했고, 이후 15년 동안 세 번 더 우승했다.

윌리 파크 시니어는 가끔 한 발로 서서 샷을 하는 등 관중을 위해 화려한 골프를 보여주고 즐기는 재능이 뛰어났다. 동생 뭉고 파크(1836~1904) 역시 형 못지않은 재능이 있었다. 뭉고 파크 역시 윌리 파크와 같이 어렸을 때 골프를 배웠지만, 20년간 선원으로 일하다가 1870년대에 고향으로 가서 골프를 다시 시작했다. 마흔 살에 가까운 나이에 골프채를 다시 든 뭉고 파크에 대해 누구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뭉고 파크는 1874년에 디 오픈 우승까지 했다.

골프 가문 파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윌리 파크 시니어의 아들 윌리 파크 주니어(1864~1925)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골프를 배우며 캐디 일을 했고, 16세에 첫 번째 디 오픈에 참가했다. 그는 결국 1887년, 1889년에 두 번 디 오픈을 우승했다. 파크 가문에서만 총 7개의 디 오픈 우승을 나누어 가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파크 주니어는 부친이 시작한 클럽 제조회사를 이어받았고, 유럽과 북미를 통틀어 170개의 골프 코스를 디자인하며 코스 설계를 본업으로 삼게 되었다.


게리 플레이어가 1978년 마스터스 골프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차지한 한 후 아들 웨인, 딸 제니퍼와 함께 웃고 있다. 그의 아들 웨인도 골프 선수였다.

골퍼 인기 치솟자 ‘2세 골퍼’ 부담 가중

그러나 1900년대에 들어서며 프로 선수들이 자녀들을 프로 골프의 세계로 이끌던 추세가 꺾였다. 미국에서 급격히 프로 골프의 인기가 상승하자, 프로 골퍼들이 더 이상 다른 사업들로 생활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다. 또 대회가 많아지며 선수들이 더욱더 골프 연습에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하다 보니 자녀를 키우고 골프를 가르칠 이유도, 여유도 점점 사라졌다. 실제로 바이런 넬슨(1912~2006)과 벤 호건(1912~1997)은 자녀를 키우지 않았다.

월터 헤이건(1892~1969)의 두 번째 아내는 “헤이건은 자나 깨나 골프 생각밖에 안 했다. 거실에서도 하루 종일 스윙 연습만 했다”며 골프 중독 때문에 가정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밝혔다. 신사 이미지로 미국 팬들의 사랑을 받은 해리 바든(1870~1937)은 불륜에 대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 혼외자인 피터 하월의 존재를 숨기고 끝내 외면했다. 하월은 만년에 부친인 바든이 본인을 아들로 인정하고 키워줄 용기가 있었다면, 본인도 골프 챔피언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며 회고했다. 반면 스코틀랜드 출신의 스미스 형제는 골프를 가업처럼 생각했던 전 세대의 모리스 부자나 파크 가문처럼 다섯 형제가 모두 수준급 골퍼였다.

그중에서도 윌리(1876~1916)와 알렉스 스미스(1874~1930)는 US오픈 우승 경력이 있다. 1899년에 윌리 스미스가 형제 중에 처음으로 US오픈에서 우승했고, 이후 1906년과 1910년에 알렉스 스미스가 이어서 US오픈을 두 번 우승하는 쾌거를 이뤘다. 심지어 1910년 우승 때 연장전 상대는 다름 아닌 막내 동생인 맥도널드 스미스(1890~1949)였다. 동생이 아깝게 패배하는 모습을 봐야 했기 때문에 한편으론 씁쓸함을 느꼈을 것이다. 막내 맥도널드 스미스는 결국 US오픈과 디 오픈 둘 다 준우승만 몇 번 하고 메이저 우승은 끝내 놓치고 말았지만, PGA투어에서 24승이나 거뒀다.

1950년대부터 프로 골퍼들이 연예인급으로 유명해지면서 그들의 자녀들은 대중의 지나친 관심으로 인해 프로 선수가 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골프 전설’ 잭 니클러스를 부친으로 둔 개리 니클러스는 16세에 미국 유명 스포츠 잡지에서 ‘제2의 니클러스’라는 별명과 함께 대대적으로 소개됐다. 그러나 개리는 과도한 부담을 느꼈다. 개리는 “열셋, 열네 살 때는 정말 잘 쳤지만 사람들에게 받던 관심만큼 훌륭한 골퍼는 아니었다”라고 인정했다.

실제로 개리 니클러스는 아버지와 외모는 판박이였으나 PGA투어 출전 자격을 얻는 데만 9년이 걸렸고, 3년 동안 투어 활동을 했지만 단 한 번의 우승 없이 은퇴했다. 물처럼 흐르는 스윙과 메이저 3승으로 유명한 줄리어스 보로스의 아들 가이 보로스는 “어렸을 때 사람들이 아버지만큼 잘 치고 싶은지 물어보면, 순진한 마음에 아버지를 능가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나이가 드니 아버지의 반만큼만 했어도 만족했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게리 플레이어 아들 웨인 플레이어 역시 주니어 시절에 대회들을 휩쓸고 다녔고, 부친 게리 플레이어와 US오픈과 디 오픈도 함께 출전하며 상당한 가능성을 보였었다. 그러나 웨인 플레이어는 아버지의 성공 원인이었던 특유의 성실함이 자신에게는 부족해 결국 프로 생활을 일찍 포기하게 됐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골프에서도 결국 노력이 성적을 만든다.

이시연 기자 siyeonle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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