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최근 21개 대회에서 12승을 거뒀다. 승률로 따지면 57%나 된다. 이런 상황이라면 2006, 2009년 기록한 단일 시즌 최다 승인 11승을 넘어 최고의 해를 맞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중앙선데이]
한국 여자 골프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지난 9일 바하마 파라다이스 아일랜드 오션클럽 골프장에서 막을 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퓨어실크 바하마 클래식. 우승자 김세영(22·미래에셋)을 비롯해 유선영(29·JDX)·박인비(27·KB금융그룹)까지 한국 선수 세 명이 5위 안에 들면서 리더보드 상단은 태극기로 뒤덮였다. 한국은 한 주 전 개막전 코츠 골프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최나연(28·SK텔레콤)에 이어 시즌 첫 2개 대회를 휩쓸었다.
한국은 최근 21개 대회에서 12승을 거뒀다. 승률로 따지면 57%나 된다. 올해는 수퍼 루키들의 가세로 흥행 요소가 훨씬 많아졌고, 우승 경쟁력은 더 막강해졌다. 이런 상황이라면 2006년과 2009년 기록한 단일 시즌 최다 승인 11승을 넘어 최고의 해를 맞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맨발 투혼 박세리 이후 최고 전성기
한국 여자 골프는 1998년 맨발의 투혼으로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박세리(38·하나금융그룹) 이후 전성기를 맞이했다. 2000년대 초반 너도나도 미국 투어로 진출하면서 한때 40여 명의 선수가 투어를 누볐다. LPGA투어는 아무리 멀고 돈이 많이 들더라도 여자 선수라면 누구나 한 번은 밟아봐야 하는 꿈의 무대였다.
하지만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대회 수가 급감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한국과 일본 투어가 성장하면서 선수들 사이에서는 ‘명예보다는 실리’라는 분위기가 퍼졌다. ‘골퍼라면 LPGA투어는 꼭 한 번 밟아봐야 한다’는 말은 옛이야기가 됐다. 2010년 이후 퀄리파잉(Q) 스쿨에 응시하는 발길이 뜸해지면서 지난해 LPGA투어에서 활동하는 한국 선수는 2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젊은 피가 수혈되지 않으니 쇠락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나왔고, ‘한국 여자 골프 위기론’도 대두됐다.
무겁게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다시 좋아지기 시작했다. 시즌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9월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김효주(20·롯데)가 정상에 오른 데 이어 10월 하나·외환 챔피언십에서 백규정(20·CJ)이 초청 선수 신분으로 우승한 뒤 분위기가 달라졌다.
올 시즌 LPGA투어가 다시 역대 최대 규모인 33개 대회로 늘어나면서 지난해 말 열린 Q스쿨에는 국내 투어 정상급 스타들이 대거 몰렸다. 김세영·장하나(23·비씨카드) 등이 Q스쿨을 통해 풀시드를 받으면서 올 시즌 LPGA투어의 한국 선수는 다시 28명으로 늘어났다. LPGA의 변진형 아시아투어 지사장은 “스타 플레이어들은 더 큰 무대를 찾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에 골프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복귀하면서 태극 마크를 달기 위해서는 가장 큰 무대인 LPGA투어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커졌다”고 분석했다.
2000년대 초반 LPGA투어로 건너간 선수들은 맨땅에 헤딩식으로 투어를 개척했다. 실력으로는 최고였지만 언어와 문화의 장벽에 부딪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완전히 다른 잔디와 코스에 적응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미국 코스에 익숙하고 영어도 수준급
그러나 요즘 선수들은 10여 년 전과 비교하면 완전히 달라졌다. 코츠 골프 챔피언십에서 2위를 한 장하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미국 대회에 출전하면서 미국 코스에 익숙하다. 체력과 쇼트 게임도 체계적으로 준비했다. 김세영도 프로 데뷔 이후 종종 초청 선수로 LPGA투어에 출전하면서 적응력을 길렀다. 영어도 짬짬이 배우면서 막힘 없는 회화 실력을 갖췄고, 그 덕분에 유창한 우승 인터뷰를 했다. 세계 랭킹 2위 박인비는 “요즘 투어에 데뷔하는 선수들은 루키라고 여기기 힘들다. 워낙 체계적인 준비를 많이 하고 미국으로 건너와 투어에 적응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신인이 우승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루키들의 활약은 나에게 새로운 동기 부여가 된다”고 했다.
루키들의 맹활약은 투어의 분위기도 바꾸고 있다. LPGA투어의 베테랑 선수들은 지난 몇 년간 연습 시간이 성적과 비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연습량을 차차 줄였다. 그러나 최근엔 다시 연습량을 늘리는 추세다. 코츠 골프 챔피언십에서 26개월 만에 우승한 최나연은 “올해 실력파 루키들이 많이 합류한 것이 큰 자극이 됐다. 그만큼 지난겨울에 일찌감치 훈련을 시작해 더 많은 준비를 한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체력 보강하면 11승 기록 경신 시간문제
한국은 2013년 혼자 6번이나 우승컵을 들어 올린 박인비의 활약으로 시즌 10승을 거뒀다. 지난해에도 박인비·이미림(25·우리투자증권) 등이 다승을 거두며 10승을 기록했다. 한두 명의 스타 플레이어가 투어를 이끄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올해는 우승 후보를 손가락으로 꼽기 힘들 만큼 강자가 많다. 춘추전국시대 형국이다. LPGA의 변진형 지사장은 “퓨어실크 바하마 클래식에서 우승한 김세영은 김효주나 장하나에 비하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선수였다. 두 번째 대회 만에 우승하자 미국 언론도 깜짝 놀라는 분위기였다. 김세영은 물론 한국 선수들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루키들의 활약은 한동안 잠잠했던 기존 선수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2년 메이저 대회인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 우승 이후 스윙 교정으로 부진에 빠졌던 유선영은 2개 대회 연속 톱10에 입상하며 부진을 털어냈다. 지난해 왼 손목 건막염 부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던 박희영(28·하나금융그룹)도 부상에서 완쾌돼 골프화 끈을 다시 조여 매고 있다. 박원 J골프 해설위원은 “기존 선수들은 투어 생활에 피로를 느꼈고, 도전 의식도 없어졌던 게 사실”이라며 “루키들의 활약이 언니 선수들에게 새로운 도전 의식을 불어넣었다”고 평했다.
시즌 첫 2개 대회에서 한국 선수가 잇따라 우승을 차지하자 한국 선수 역대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임경빈 J골프 해설위원은 “지난해 상반기 한국은 18개 대회에서 1승에 그쳤지만 하반기에 9승을 거뒀다. 골프는 그만큼 흐름이 중요한 스포츠”라며 “한국 선수들의 약점으로 꼽히는 체력만 보강한다면 역대 최고의 시즌을 만들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전망했다.
이지연 기자 easygolf@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