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박은 한 때 은퇴를 고민했다. 깊고 어두운 터널 속에서 빛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의 사랑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승이라는 꿈을 이뤘다. 이제 애니 박은 ‘행복 골프’를 꿈꾼다.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과 행복을 나누며 오랫동안 필드를 누비고 싶단다.[사진 신중혁]
미국 아마추어 무대를 주름잡았던 ‘미국 동포’ 애니 박. 탄탄대로를 걸었던 지난 세월과 달리 미국LPGA투어의 벽은 높았다. 골프와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가족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마지막으로 도전해보자고 다독였다. 그렇게 골프 인생의 반전은 시작됐다.
선두와 4타차. 큰 격차만큼이나 세계랭킹 236위인 ‘미국 동포’를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상대는 투어 통산 6승에 빛나는 ‘역전의 명수’ 김세영. 관심의 무게추가 한 쪽으로 쏠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더군다나 김세영은 전날 무려 8타를 줄이며 절정의 샷 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지난 6월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투어 숍라이트클래식 최종 라운드는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 같았다.
다윗은 소리 없이 강했다. 전반 3~5번 홀에서 3연속 버디를 잡으며 치고 나갔다. 중반에 접어들자 10m가 넘는 이글·버디 퍼트도 쏙쏙 집어넣었다. 이에 반해 골리앗은 좀처럼 타수를 줄이지 못했다. 그 사이 또 다른 골리앗인 ‘일본 여자골프의 간판’ 요코미네 사쿠라가 코스 레코드를 기록하며 턱 밑까지 쫓아왔다. 그렇지만 골프의 신(神)은 다윗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그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 주인공은 애니 박, 한국 이름은 박보선이다.
애니 박은 “올해 힘든 일이 많았던 터라 더욱 기뻤다. 드디어 해냈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많이 났다. 엄마를 포함해 가족들이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며 “우승으로 풀시드를 따낸 덕분에 투어 일정을 계획대로 짤 수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고 싱긋 웃었다.
은퇴까지 고민했던 미국 아마 최강자
올해 23세인 애니 박은 한국 골프팬들에게 다소 낯설지만 미국 아마추어 무대에서는 유명했다. 명문인 USC(서던 캘리포니아대학교)에 골프 장학생으로 입학한 뒤 맹위를 떨쳤다. 2013년 미국대학체육협회(NCAA) 골프 개인전 우승을 하는 등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아마추어 시절 우승 경험이 프로에 와서도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2015년 프로로 전향한 이후에도 애니 박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그 해 애니 박은 태양처럼 뜨거웠다. LPGA투어 2부인 시메트라투어에서 11개 대회에 출전해 3승을 올렸다. 신인왕은 물론 상금왕도 거머쥐었다. 두 부문을 석권한 것은 지난 2009년 미나 헤리게 이후 6년 만의 일이었다. 또 평균 60대 타수를 적으며 최소타수상을 차지했다. 2부투어 무대에는 적수가 없었던 셈이다. LPGA투어 우승도 금방 손에 잡힐 듯했다.
하지만 1부 투어의 벽은 높았다. 커트 탈락을 밥 먹듯이 했다. 데뷔연도 상금랭킹은 82위에 그쳤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지난해에는 허리 부상까지 찾아왔다. 통증이 심해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갑작스런 환경 변화도 악재로 작용했다. 애니 박은 “대학과 너무 다른 환경에 신인 시절부터 힘들었다. 이런 생활을 계속해야 된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정말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그는 결국 어렵게 따낸 투어 시드도 잃고 말았다. 애니 박은 골프 클럽을 내려놓을 생각도 했다. 그는 “지난해 12월에는 다른 길도 생각했을 만큼 정말 그만두고 싶었다. 만약 그만뒀다면 대학 때의 전공(커뮤니케이션)을 살렸을 것 같다”고 귀띔했다.
‘120% 노력’이 일궈낸 기적
벼랑 끝으로 내몰렸을 때 손을 내민 건 다름 아닌 가족이었다. 3녀 중 막내인 애니 박은 어머니 박영희 씨와 둘째 언니를 잘 따랐다. 특히 둘째 언니는 애니 박에게 둘도 없는 친구이자 멘토다. 애니 박은 무심한 듯 툭 내뱉는 언니의 조언에 큰 영감을 받는다고 했다.
애니 박은 “평소 엄마와 둘째 언니가 골프 뒷바라지를 해주시는데 언니가 ‘120%의 노력으로 딱 한 번만 더 해봐라’는 얘기를 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도전해보자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가족의 든든한 지원 사격 속에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애니 박은 다시 골프화 끈을 조여 맸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를 가르쳤던 션 폴리와 스윙 자세부터 매만지기 시작했다. 허리에 부담을 주지 않는 스윙을 만들기 위해 굵은 땀방울을 쏟아냈다. 애니 박은 “아픈 허리 때문에 스윙을 바꿔야 했다. 1년 동안은 많이 힘들었는데 스윙 교정 덕분에 지금 골프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약점으로 꼽혔던 퍼트는 획기적인 변화를 줬다. 일반 퍼터에서 그립 끝을 가슴 부근에 둔 채 퍼트하는 브룸스틱 퍼터로 바꾼 것이다. 여자 골퍼가 롱 퍼터를 쓴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규칙상 퍼트할 때 그립끝이나 퍼터를 잡은 손이 몸에 닿으면 안 되고, 그러면 자연히 컨트롤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퍼터 교체는 ‘신의 한 수’가 됐다. 평균 퍼트수가 한 시즌 만에 31.64개에서 29.59개로 2개 이상 줄었다.
지난 6월에도 신기에 가까운 퍼트가 우승의 일등공신이었다. 애니 박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소름돋을 정도로 퍼트가 잘 됐다”며 “오랫동안 퍼트 때문에 가슴앓이를 많이 했는데 올해 롱 퍼터로 바꾸면서 퍼트감이 올라왔다”고 했다. 언니와 약속한 ‘120%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2018년
애니 박은 올해 롤러코스터 같은 시즌을 보냈다. 크게 우승 전과 후로 나뉜다. 그는 시즌 초반에 월요 예선(먼데이 퀄리파잉)에 출전하며 투어 시드를 걱정해야 했다. 애니 박은 “올해 처음으로 먼데이 퀄리파잉에 출전했는데 그렇게 힘들 줄 몰랐다. 마음고생도 했고 다른 경기를 준비해야 하니까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드 걱정을 덜고 난 뒤에는 체력 관리에 대한 소중함을 새삼 깨달았다. 그동안 각종 경기 출전에 힘을 쏟아온 탓에 쉬는 방법을 잘 몰랐다. 이 때문에 우승 이후 10경기에서 성적이 좋지 않았다. 두 차례 커트탈락을 포함해 대부분 30위권 밖에서 맴돌았다. 애니 박은 “우승 후에 쉬었어야 했는데 여섯 경기 연속 출전했다. 쉬지 못하다 보니 허리에 무리가 갔다”고 진단했다.
애니 박은 그런 과정을 겪으며 올해 얻은 게 많다고 했다. 올 시즌을 되돌아보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최고의 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숨 죽어있던 열정도 불타올랐다. 그는 “과거 부정적인 생각을 했던 것과 달리 우승하고 난 이후에 열정이 넘친다. 이제 시작이니까 만족하지 않는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서 줄리 잉스터나 크리스티 커처럼 은퇴할 때까지 우승을 많이 하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무엇보다 자신감을 얻는 게 가장 큰 수확이다. 그 어떤 시련이 다시 찾아와도 금방 일어설 수 있다고 확신한다. 애니 박은 “전에 경험을 했으니까 이제는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모든 게 엄마가 강하게 키워주신 덕분”이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애니 박은 약점을 메워가며 비상했다. 이제는 자신의 강점을 더욱 날카롭게 다듬고자 한다. 그는 “장점인 어프로치샷을 살려 남들이 봤을 때 편안하게 잘 친다는 느낌을 주고 싶다”고 했다. 장타에 대한 욕심도 숨기지 않았다. “원래 거리가 많이 나갔다. 허리에 부담이 덜해지면 점차 드라이버샷 거리를 늘릴 계획”이라며 “더스틴 존슨이나 세영 언니처럼 멀리 치고 싶다”고 얘기했다.
애니 박은 인터뷰 내내 가족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가족을 향한 진한 사랑이 배어 나왔다. 그는 “내 인생의 가장 큰 가치는 좋은 사람들을 만들고 가족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다”며 “우승을 해서 정말 기뻤지만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 행복을 공유하는 게 진정한 행복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평생 함께하기 때문”이라며 씩 웃었다. 가족 사랑에 힘입은 애니 박의 ‘행복 골프’가 투어 무대도 따뜻하게 물들이길 기대한다.
서창우 기자
PROFIL
생년월일 1995년 4월 9일
신장 175cm
장기 어프로치샷
프로 전향 2015년
주요 경력 2013년 미국대학체육협회(NCAA) 디비전 1 개인전 우승
2015년 LPGA투어 2부 시메트라투어 신인왕·상금왕·최소타수상
2018년 LPGA투어 숍라이트클래식 우승
LPGA투어 뷰익 LPGA 상하이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