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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화영의 KPGA 선수史 3] 아시아 대회 첫승 김승학

남화영 기자2022.12.07 오전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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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한국오픈에서 우승한 김승학. [자료=KPGA]

1947년생인 김승학은 한국프로골프(KPGA)코리안투어 회원 번호(TP 1968-0019) 19번이다. 1968년 KPGA협회가 공식 창립된 다음달인 12월에 열린 두번째 테스트를 통해서 프로 자격을 얻었다.

서울 능동에 살아 골프장에서 일하던 형의 영향으로 골프를 시작했고 178cm의 큰 키에 좋은 체격을 가져 당시 손흥수, 최금천, 김석봉, 조진석, 강영일과 함께 프로가 됐다. 실력은 빼어났다. 당시 2라운드 36홀 테스트 합격 타수는 12오버파 156타였는데 그는 4언더파 140타로 커트라인보다 무려 16타가 적었다.

프로 데뷔할 때부터 특출했던 그는 71년 월드컵에 당시 최고 선수인 한장상과 짝을 이뤄 출전해 5위를 기록했다. 척박한 골프 환경에서 이룬 한국 콤비의 성적은 그로부터 30여년 지나 2002년 최경주와 허석호가 공동 3위를 기록하기 전까지 한국의 월드컵 출전 사상 최고 성적이었다.

1973년 필리핀오픈 우승.[사진=KPGA]

73년 필리핀오픈 우승
지금까지도 ‘아시아 톱 스타’로 기억되는 것은 73년 아시아서키트인 필리핀오픈에서의 우승 때문이다. 필리핀오픈은 1913년에 창설되어 호주오픈과 함께 아시아 태평양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아시아 메이저 대회였다. 그래서 아시아뿐만 아니라 미국, 호주, 유럽의 프로들도 종종 출전했었다.

김승학은 필리핀오픈이 열리기 2주 전에 출전한 싱가포르오픈에서 4라운드 합계 2언더파 286타를 기록하면서 1타 차이로 연장전에 출전하지 못했고 4위로 마쳤다. 싱가포르에서 좋은 기운을 얻어 필리핀 마닐라로 향했다. 당시 대회는 3월25일 왁왁골프장에서 마무리되었는데 최종 합계 1오버파 289타(72-72-71-74)로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아시안투어가 열리기 전이지만 아시아 여러 나라가 돌아가면서 대회를 개최하느라 ‘서키트’라 불렀다. 골프로는 신생국에 가깝던 한국에서 온 선수가 필리핀의 골프 영웅 벤 베르다가 63년에 세운 1오버파 최저타 타이 기록으로 우승하자 인터뷰가 쏟아졌다. “그레이엄 마시(호주)와 장춘발(대만)이 1타 차로 뒤쫓아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꼭 이기고 싶었다. 참으로 오랫동안 노렸던 것을 얻어내 기쁘다.”

감격적인 첫승을 해외에서, 그것도 메이저급 대회에서 거둔 뒤로 상승세는 가팔랐다. 첫승 이후 21일만에 국내 첫 승을 내셔널 타이틀인 한국오픈에서 거뒀다. 그해는 태릉골프장에서 대회가 열렸는데 필리핀의 레가스피에 4타 뒤에서 최종 라운드에 돌입했지만 1타 차로 역전했다.

1971년 한국오픈 [사진=KPGA]

한국인으로 디오픈 첫 출전
필리핀오픈 우승으로 그는 한국인 중에 디오픈 첫 출전권이라는 보너스를 받았다. 73년 7월11일 스코틀랜드 어셔의 로얄트룬에서 열린 대회 첫날은 75타로 공동 37위의 비교적 좋은 출발이었다. 둘째날은 첫날보다 1타를 줄인 74타를 쳤지만 순위는 42위였고, 셋째날은 77타를 쳐서 공동 64위로 쳐지면서 최종 라운드에는 나가지 못했다. 총 60명이 최종 라운드에 진출했는데 1타가 모자란 아쉬운 결과였다.

에서 김승학은 “그해에는 어느 대회에 나가서도 5위 이내에 드는 신나는 행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처럼 디오픈에서 아쉽게 최종 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 귀국 후 연습 강도를 높이다가 결국은 고질적인 허리 부상을 당했다. 그건 프로 인생에 대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부상 후유증은 3년 정도 이어졌고, 아시아에서도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국내외 1승씩을 하고 3년이 흐른 76년에 부활했다. 메이저인 한국프로골프(KPGA)선수권 우승에 이어 77년 오란씨오픈, 78년 한국오픈에서 우승하는 등 해마다 1승씩을 올렸다. 77년에는 필리핀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한장상과 다시 짝을 이뤄 나가 9위를 기록했다. 79년에는 부산오픈과 삼양오픈에서 2승을 거두고 데뷔 11년만에 처음으로 상금 1위에 올랐다.

77년 오란씨오픈에서 우승후 동아식품 강신호 사장과 포즈를 취했다. [사진=KPGA]

70년대의 대표 스타
이듬해에도 상승세는 이어졌고 삼양오픈과 KPGA선수권에서도 리더보드 최정상에 자리하면서 2년 연속 2승을 거두면서 2년 연속 상금 1위에 올랐다. 70년대 중-후반부터 독주체제를 확고히 했던 한장상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8시즌 동안 국내 8승, 해외 1승 총 9승을 거둔 70년대 대표 스타였다.

80년의 KPGA선수권을 끝으로 더 이상 승수는 올리지 못했다. 특히 지난 83년에는 디오픈에서 얻은 부상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36세의 한창 나이에 은퇴해야 했다.

은퇴 후에는 사업가이자 골프잡지도 발행했다. 골프 용품을 수입 판매했으며 91년에는 일동레이크골프장을 만들어 초대 사장을 지냈다. 선수로 아쉬움을 달래고 유망주를 발굴하려고 매니지먼트 회사인 KGM(김승학골프매니지먼트)을 차리기도 했다.

2000년엔 제10대 프로골프협회장 선거에서 당선되어 4년간 KPGA 회장도 역임했으나 웅포(베어리버) 골프장 조성 관련 잡음과 비리로 인해 선수 생활로 얻은 명예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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