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LPGA Star’s The Moment To Remember '오늘의 그녀를 만든 그때 그 순간' [사진 신중혁]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투어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치고 있는 한국 선수들. 그중에서도 올 시즌 특히 주목 받는 8명의 선수를 이 만났다. 오늘의 그들을 만든 ‘모멘텀’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의 가장 가까운 측근에게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자세히 들어봤다.
▶골프 신동이 처음 겪은 쓴맛, 아시안게임 대표 낙마가 ‘보약’ 됐다.
탈락 불운 딛고 성장한 ‘국보 소녀’ 김효주
‘골프 신동’으로 불린 김효주는 각종 주니어대회를 휩쓸었고 태극마크도 일찍 달았다. 육민관중 시절부터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그렇지만 김효주는 ‘아마추어 국가대표의 꽃’이라 불리는 아시안게임에는 못 나가는 불운을 겪었다.
한연희 스윙코치는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대표팀 탈락이 오늘날의 김효주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됐다고 분석했다. 한 코치는 “효주는 중학교 때부터 주니어에선 이미 톱이었다. 충분히 아시안게임에 나갈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했다. 2010년 당시 육민관중 3학년이었던 김효주는 국가대표 막내였지만 에이스 기량을 뽐냈다.
그해 4월 퀸시리트컵 아시아태평양 여자 아마추어대회에 출전한 막내 김효주는 개인전과 단체전 2관왕을 차지해 골프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2009년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투어 하이트 챔피언십에 초청 선수로 출전해 2라운드까지 공동 선두를 달리는 등 두둑한 배짱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자 김효주의 광저우 대표 선발은 따놓은 당상처럼 보였다. 선발전 초반에도 김효주는 선두를 달렸다. 하지만 김효주는 한정은, 김지희, 김현수에 밀려 탈락했다. 여섯 살 때 골프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맛본 쓴맛이었다. 한 코치는 “실력은 있지만 경험 미숙이 나타났다.
내색은 안 했지만 많이 속상해하고 눈물도 글썽이더라”고 회상했다. 김효주도 아시안게임 탈락 후 “3일 동안 잠을 못 잤다. 그냥 누워 있어도 눈물이 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효주는 비 온 뒤 땅이 굳어지듯 더 단단해졌다. 김효주는 대원외고 2학년이었던 2012년 KLPGA투어 개막전 롯데마트 오픈을 아마추어 신분으로 우승했다. 한 코치는 “효주는 널리 알려진 대로 부드럽고 몸에 무리가 없는 스윙을 한다. 리듬이 최대 장점이다. 공을 똑바로 정확하게 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한 코치는 “축구공 등 다른 공들을 다루는 감각이 뛰어나다”고 덧붙였다.
2012년 10월 프로로 전향한 김효주는 거침없이 치고 나갔다. 두 번째 시즌 만에 KLPGA투어를 점령했다. 2014년에 김효주는 5승을 수확했고, 12억원으로 한 시즌 최다 상금마저 경신했다. 세계적인 성공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 대회는 KLPGA투어 한화금융클래식이었다. 김효주는 5언더파로 우승컵을 들었다. 한 코치는 “당시 태풍이 불어 바람이 무시무시했다. 긴 러프 속에서도 혼자 5언더파로 우승을 하는 것을 보고 정말 잘하는 선수라고 인정하게 됐다. 또 세계적인 선수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2위 이정민의 스코어는 1오버파였다.
김효주는 2014년 LPGA 메이저 대회인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대형사고’를 쳤다. 1라운드에서 신들린 퍼트감으로 10언더파 61타를 기록하며 골프계 새 역사를 썼다. 61타는 남녀 메이저 18홀 통틀어 메이저 최저타 신기록이었다. 1라운드의 기세를 몰아 김효주는 우승까지 했다. 김효주는 LPGA투어 첫 승을 메이저에서 장식하며 ‘국보 소녀’로 떠올랐다. 김효주는 여전히 태극마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먼저 인터내셔널 크라운에 한국 대표로 출전하고 싶어한다. 도쿄올림픽까지 바라보고 있다.
도움말 한연희(전 국가대표 감독)
⑦편에서 계속됩니다.
김두용 기자 enjoygolf@joongang.co.kr
이지연 기자 easygolf@joongang.co.kr